(사)우사김규식박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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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늘은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1881.1.29.~1950.12.10) 서거일
독립운동가 우사 김규식 선생(1881.1.29~1950.12.10)은 언어의 천재이며 탁월한 정치인이었다. 상해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다. “본래 우리의 독립은 평화회의나 모종의 유력한 단체로부터 승인을 받던지, 첩지(帖紙)를 내어 주듯 할 것이 아니오. 우리의 최고기관으로부터 각 단체 또는 전 민족의 합심과 준비 여하에 달렸나니, 이것이 있으면 우리에게 독립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파멸이 있을 따름이오.” -상해 연설 中 김규식 선생은 독립운동사 전체를 통틀어 그 누구보다 현실을 냉철히 바라봤던 당대의 엘리트 석학으로 손꼽힌다. 기록에 따르면 8개 국어를 유창하게 회화할 수 있었던 어학의 천재였으며,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시절에는 러일전쟁과 일본의 승리를 미리 예견하였고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다 언더우드의 비서로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천재이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선생의 유년시절은 슬프다 못해 매우 비참했다. 선생이 그토록 냉정하게 성격으로 세상을 바라봤고 공부에 전념하였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가난했던 삼촌들은 2~3살이던 아이가 굶주림으로 인해 영양실조와 열병이 걸려 죽기직전까지 갔을 때도 뒷방에 눕히고 병풍을 쳐놓았다고 한다. 당시 언더우드 목사는 아이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강원도까지 찾아가 분유와 약을 들고 아이가 있…
[4] "이기후(동해) 김규식 박사 기념사업회 회장, 제62주기 추모학술행사"
이기후 재경동해시민회장, (사)우사 김규식 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은 12월 10일 오전11시 마포구 서교동 강원도민회관 대회의실에서 우사 김규식 박사 제62주기 추모학술행사를 개최했다. '우사의 민족화합과 통일정신'을 주제로 진행된 이날 학술대회에는 조인형 박사(강원대 명예교수) 김택 박사(중원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였으며, 김성주 박사(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노태구 박사(경기대 교수)가 토론자로 나와 우사의 애국정신을 재조명했다.
[3] 김규식 박사 기념사업회 이기후 회장은...
우사 김규식 박사 기념사업회 주최로 12월 10일 열린 우사 김규식 박사 순국 66주기 추모식은 국민의례, 애국가 제창, 묵념, 약전보고 및 개회사, 추모사, 헌화, 유족대표 인사말씀, 학술강연의 식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김규식 박사 기념사업회 이기후 회장은 “평생 조국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을 하신 박사님께서는 50년 전 바로 오늘 조국의 통일을 보시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습니다. 박사님께서는 염원하시던 통일의 과업은 저희 후손들에게 맡기시고 부디 편안히 영위하시길…”라고 선생을 기렸습니다.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김시명 회장은 “김규식 박사님의 외국어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들었습니다. 박사님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독립운동을 한데 모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많은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통일하는 통일전선 구축에 힘쓴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외교관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잇고 단체들을 연결하여 국가를 만들어나가는 그 탁월한 능력은 오직 나라를 위해서만 쓰였으며, 이러한 박사님의 위대한 일생을 통하여 얻는 그 교훈은 우리의 후손들의 가슴마다 빛나는 보석으로 반짝일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사 김규식 박사님의 명복을 빕니다.”고 추모사를 하였습니다. 이후 헌화와 유족대표 김수진 여사의 인사말씀, 학술강연으로 행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
[2] [우사 김규식 박사 순국 66주기 추모식]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을 폭로
1918년 중국 상해에선 독립운동가 여운형, 서병호 등이 신한청년당을 조직, 독립운동을 추진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신한청ㄴ연당은 1919년 1월 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대표를 파견하여 일제 식민지의 실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했습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적격자로 김규식 선생이 선택되었습니다. 영어, 불어, 중국어, 일어 등 뛰어난 언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박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장으로서 회보를 발간, 각국 대표와 언론사 등에 배포하며 3•1만세운동 등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대한 소식을 전세계에 알렸습니다.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 환국 기념회 모습 (단상 첫 줄 왼쪽 두 번째 : 김규식 박사, 좌측 : 김구 선생) (출처 : 위키백과) 이후 1935년 7월 박사는 대한독립당, 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5당을 통합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하며 독립운동 단체들의 결속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1941년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참여를 선언하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선전부장직을 역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1943년 4월 부주석이 되어 김구 주석과 함께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남북협상의 참여하는 등 단독정부의 수립을 막기 위해 애쓰셨으며, 1950년 12월 10일 70세의 나이로 서거하셨습니다. …
[1] 2016.12.19 [우사 김규식 박사 순국 66주기 추모식]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을 폭로, 한국의 독립을 …
1919년 1월 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대표로 파견, 일제 식민 통치의 실상을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했던 독립운동가 우사 김규식 박사. 그의 순국 66주기 추모식이 지난 12월 10일 4•19혁명 기념 도서관에서 열렸습니다. 우사 김규식 박사, 그는 누구인가? 언더우드 학창 시설 김규식 박사 (맨 앞줄 가운데) (출처 : 위키백과) 우사 김규식 박사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대표로 파견되어 외교활동을 펼쳤고, 이후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독립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는 어릴 적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목사 집에 입양되어, 민로아학당과 구세학당에서 서양식 근대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후 느록대학에서 수학했는데, 라틴어, 불어, 독일어 등 그의 외국어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그는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선생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출처: http://mpva.tistory.com/tag/우사 김규식 박사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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