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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의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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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출생과 가계

김규식은 1881년 2월 28일(족보에 의하면) 조선 경상남도 동래부사 종사관인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김용원)과 어머니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자 마자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을 따라 그는 본가가 있는 강원도 홍천으로 갔다. 따라서 그를 강원도 출신으로도 간주하기도 한다.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는 아버지 김지성(김용원)과 할아버지 김동선 내외의 묘소가 소재하고 있다.[4]

김규식은 청풍 김씨 중방파(仲房派) 23세손으로, 전라도관찰사 의정부 영의정 김징(金澄)의 8대손이었다. 김구(金構), 김유(金楺)는 그의 7대 방조였다. 그의 가계는 김상로, 김재로, 김치인 등을 배출한 노론가의 방계였다. 노론 명문가의 후예로 노론 벽파의 거두였던 김상로, 김양로, 김재로, 노론 청명당의 지도자였던 김치인 김종수 등은 그의 방계 선조들이었다. 김익로는 현감을 지냈지만 당대의 정치 거물인 김상로, 김양로, 김재로의 사촌 형제였다. 김익로는 김규식의 6대조였다. 그러나 노론 벽파로 분류된 그의 가계는 순조대 이후 몰락했고, 할아버지 김동선(金東璇)의 대에 다시 벼슬에 올라 참봉(參奉)을 지냈다.[4]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은 인텔리로 일본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선전관을 역임하였고[5], 15세 때부터 왕실의 시종무관으로 근무했다.[6] 개항 이후에는 외무관리로 일본, 러시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왔으며[5] 당시 동래부사의 부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4]

유년기와 소년기

불우한 유년기
4~8세 무렵의 김규식, 경성부 언더우드 학당에서 촬영
4~8세 무렵의 김규식, 경성부 언더우드 학당에서 촬영

당시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정간섭을 단행하고, 일본과의 불평등한 교역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자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은 민씨정권의 대일무역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빌미가 되어 유배를 당하였다.[5] 형 김규찬은 큰아버지 김우성의 양자로 갔고, 그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5]

1887년 어머니(혹은 법적 어머니) 경주이씨마저 죽었기 때문에 어린 김규식은 숙부들의 집에 맡겨졌으나, 숙부들과 친척들도 생활 형편이 어려웠다. 1886년 5월 구걸을 하던 김규식이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갔는데, 외모는 남루했지만 아이의 눈엔 총기가 있어 보였다고 한다. 김규식은 조선의 첫 고아원 겸 예수학당(경신학당)의 학생이 됐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고 해서 언더우드는 그를 '번개비'라고 불렀다.[7] 언더우드는 내한후 1년뒤 고종의 호의로 승인을 얻고 고아원을 설립했으며 처음에는 직원수가 부족하여 언더우드가 직접 고아원을 관리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2] 유아를 맡기 힘든 언더우드의 고아원은 다시 김규식을 그의 일가에게로 돌려보냈다.[8] 열병에 걸려 치료도 못받고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9]

중병에 걸려서 돌보는 사람이 없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신도 병환 중이었으나, 약과 우유를 들고 강원도 홍천으로 갔다. 당시 고열과 질병에 시달리던 어린 김규식을 포기한 숙부들은 병풍을 쳐놓고 그 뒤에 눕혀놓았고, 병과 함께 굶주림에 허덕이던 김규식은 벽지를 뜯어먹으며 먹을 것을 달라며 울며 애걸하였다 한다.[8]

언더우드 소학교 재학 시절
조선인 최초의 유아세례자 중 4인(뒷줄 좌로부터 서병호, 김규식, 앞줄은 김일, 원한경
조선인 최초의 유아세례자 중 4인(뒷줄 좌로부터 서병호, 김규식, 앞줄은 김일, 원한경

병약한데다가 영양실조까지 걸렸던 그는 영양실조로 인해 여러가지 잔병치레를 하기도 했다. 후일 김순애(金順愛)에 의하면 그는 위장병이 심했고 오랫동안 간질병에도 시달렸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10] 그러나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기도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너무 굶주린채 방치되었던 김규식은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삼키고 있었다.[2] 언더우드는 그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어려운 입장이었으나 그를 고아원으로 데려가고자 노력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아이가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하면서, 언더우드의 그러한 행동을 말렸다.[2]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는 주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김규식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언더우드는 간질과 위장병과 굶주림으로 쇠약해진 그를 돌보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아이를 극진히 간호했다. 간질과 위장병을 심하게 앓던 그는 언더우드의 지극정성과 간호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2] 그 뒤 언더우드는 그에게 기독교와 영어를 가르쳤고 그는 빨리 영어 단어와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였다.

당시 김규식은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의 동의하에 언더우드에게 영어교육차 보내졌다는 설이 있고, 김지성(김용원) 유배 후 방치된 그를 언더우드가 데려다 간호한 뒤, 언더우드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이후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집에서 그가 세운 학당을 다니며 소년기를 보냈다.[8][11]

청소년기와 방황

언더우드 학당 시절 (1888년경), 맨 앞줄 가운데가 김규식
언더우드 학당 시절 (1888년경), 맨 앞줄 가운데가 김규식

1888년부터 김규식은 언더우드 학당에 다니면서 영어와 수학, 라틴어, 신학, 과학 등을 배웠다.

김규식은 영어를 빨리 배우고 정확하게 구사하였다.[12] 그러나 언더우드 몰래 가출하여 아버지를 찾는다고 경성부를 거리를 다니다가 교인들에 의해 잡혀서 다시 언더우드의 집으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고는 하였다. 그 뒤 우연한 기회에 부친 김지성(김용원)을 상봉하여 고향 홍천으로 돌아갔다. 이 일로 김규식은 언더우드목사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그러나 1891년 할머니가 사망하고, 1892년 부친마저 사망했다.[13] 1894년 가을 할아버지 김동선과 큰형이 사망했고, 김규식은 완전히 고아가 되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숙부들 역시 그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13]

청소년기에 계속된 비극과 철없는 동네 소년들, 무정한 어른들이 보여준 멸시와 차별은 그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13] 성인이 된 뒤에도 다정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냉정하고 차가운 인간이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13]이정식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성격의 근원은 유년기와 소년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라 보았다.[13]

후일 그는 정치, 외교, 독립운동 활동을 진행하면서도 어떤 계파나 파벌에 연연하거나 스스로 엮이려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대한민국의 사학자 도진순은 이처럼 김규식이 '가족, 집안, 씨족, 파벌 등과 같은 한국의 토착적 기반과 일찍부터 유리되었으며, 이것은 그가 평소 정치적 파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합작에 노력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13]'고 보았다. 주변의 냉담한 시선과 고아라는 차별대우(혹은 서자라는 멸시), 그의 불우한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무정함 등은 후일 그를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시선을 갖게 만들었다.

청년기

청년기 활동과 도미 유학

언더우드의 세심한 배려와 지원으로 김규식은 서양문물과 근대교육을 폭넓게 접할 수 있었다.[2]언더우드의 배려로 언더우드가 세운 사립학당인 예수교학당 혹은 민노아학당으로도 불리던 언더우드 학당에 입학하였다. 이후 신앙활동에도 투신하여 그는 한국인 교역자들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의 하나로 인정을 받으며 성장하였다.[2] 언더우드의 극진한 배려와 친자식과 다름 없는 릴리스 여사의 간호와 양육에도 불구하고 주변인들의 멸시와 험담은 그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성인이 되면서 그런 상처를 극복하지만 그는 합리적이고 냉철한 사람으로 변모해간다.

1894년 언더우드 학당을 마치고 김규식은 1894년 3월 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한성 관립영어학교는 영국인 허치슨(W. F. Hutchison, 轄治臣)이 교장으로 있었다.[2] 병약하고 체구가 작았던 그는 연애나 운동을 하는 것 보다는 주로 그늘에서 독서와 사색을 즐겼다.

그 뒤 1896년 서재필이 귀국하자 그를 찾아가 면담하였다.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이 독립신문사를 설립하자, 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중이던 그를 자신이 운영하는 〈독립신문〉의 취재기자로 받아들였다. 그가 경영하는 〈독립신문〉에 잠시 근무하다가, 미국 유학을 강권하는 서재필 등의 권유와 언더우드의 후원을 받아 1896년 미국에 건너갔다. 서재필은 청년들에게 나라의 개화를 위한 길은 서구의 문물을 배워오는 길이라며 미국 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그에게도 미국으로의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14]

1896년부터 1897년부터 미국 버지니아주의 목가적인 환경에서 공부하게 되었다.[15] 그곳에서는 그를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사람도 없었고 그의 출신 환경을 비웃는 사람이 없었다. 1897년 초 아르바이트와 막노동으로 스스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서재필 등이 학비를 고국에서 부쳐주었으나, 김규식은 고국에서 부쳐주는 학비에만 의존하지 않고, 등록금과 기타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였다. 1897년 9월 버지니아주에 있는 루터교 계열 인문대학 로노크 대학교의 대학 준비과정인 로노크 대학교 예과(예비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15]

대학교 재학 시절

10대 때의 김규식 (1890년대 중반)
10대 때의 김규식 (1890년대 중반)

1898년 가을 정식으로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 입학, 1903년까지 로노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16] 이후 언더우드의 지원과 함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로노크 대학교에 재학 중 그는 대한제국 고종 서자(庶子) 의친왕(義親王)과 만나 교우관계를 형성하였다. 1900년 5월에는 학교 잡지에 한국어에 대한 논문을 실었고, 1902년 2월호에는 '동방의 아침'이라는 이름으로 연설논문이 실리기도 했다.[16] 한편 한국어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할 때는 한국어 영어, 불어, 독일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와도 비교하면서 쓴 글이라 한다.[16] 2006년 한국의 역사학자 이정식은 김규식의 글을 읽고 '그만한 글을 발견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며 찬탄하기도 하였다.[16]

1901년 1월에 개최된 연설 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대학 잡지에 특집으로 실리기도 했다.[16]로노크 대학교 재학 당시 김규식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등에 뛰어났고 [16][17] 동아리 활동으로는 웅변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데모스테니언 문학회 라는 문학클럽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02년 1월 문학 동호회의 회장이 되었다.[16] 1902년 5월 로노크 대학교를 휴학하고, 미국 뉴욕주의 어빙턴에서 취직하였다. 학창시절의 학력 평점은 92.2점을 유지하였으며 1903년 6월 로노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16] 대학 졸업 당시 성적은 전체 3등이었으며,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학사였다.

1903년 5월에는 로노크 대학교 교내 잡지에 《러시아와 한국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였는데, 이 글에서 '한국의 정부는 천하고 무능력하며 정직하지 못한 정치가들의 정부이며 한국은 음모와 역 음모, 타성과 보수주의에 잠겨 있고 나라는 반역자들과 비겁한 겁쟁이들로 가득차있다'고 비판하였다.[18] 대안으로 '한국이 지금이라도 깨어난다면 머지않아 드리워질 침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며 한탄하기도 하였다.[18]

졸업식 당시 졸업 기념 연사 4인 중의 1인으로 선발되어 '러시아와 극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 러시아 침략과 러일전쟁의 결과를 예견, 분석하였다.[18]

동아시아의 미래는 다가오는 러시아 일본의 갈등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동아시아의 땅과 바다엔 한 번 더 전쟁이 울릴 것이다.

— [18]

러일전쟁을 사전에 예언하였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생하였으며, 1905년 9월 5일 전쟁의 최종 승리는 김규식의 예견대로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1903년 10월 28일 국내에서 조직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간사로 선임[19] 되었다.

대학원 재학 시절

김규식의 모교 프린스턴 대학교. 김규식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김규식의 모교 프린스턴 대학교. 김규식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03년 가을 그는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장학생으로 선발하고 학비를 지원한다 하였으나 러일전쟁이 전개됨에 따라 그는 '고국의 독립을 위해서' 라며 거절하고 귀국하였다. 1904년 가을 그는 YMCA 청년회 교육부 간사에 임명되었다.[20] 그 뒤 YMCA 이사회 이사 겸 서기를 거쳐 YMCA 교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는 YMCA 중학교 교장에 임명됐다.[20]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청나라 상하이까지 갔으나 실패하고[18], 11월 7일 귀국하였다. 그 해 만주 뤼순 항구가 일본에 함락되자 로노크 대학의 잡지에 여순항의 함락을 크림 전쟁에서의 세바스토폴의 함락과 비교한 '근대 세바스토폴의 함락'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18]

교육과 신앙 활동

1904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서가 되었다. 1905년 그는 상동교회를 찾아, 전덕기·이동녕 등과 교류하는 가운데 한민족의 나갈 길을 의논하였다.[21] 1904년 윤치호와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의 비서로 있으면서 YMCA학교 학생부 담당 겸 간사, YMCA 학교 교사, 경신학교 교사, 기독교 주일학교 교장, 배재전문학교 영어강사, 연희전문학교 영어강사, 조선기독교 대학교 1학년 2개반 담당 교수 등을 지냈다.[12] 배재학당에서 그는 영어 과목과 수사학 과목을 가르쳤다.

1906년 5월 21일에는 전 군수 조순환(趙淳煥)의 무남독녀인 조은수(趙恩受, 당시 16세)와 결혼하였다. YMCA청년회 학관의 학감으로 재직 중일 때는 양반 출신 학생들은 스포츠를 천히 여기고 그 시간을 거부했다 한다.[22] 그러나 김규식 박사는 강제로 체조를 시키고 스포츠를 장려했다.[22] 이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22]

선교와 사회단체 활동

1907년 장남 김진필(金鎭弼)이 출생했으나 6개월 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1907년 2월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의 초청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하였다. 1909년 7월 한국문법 책을 펴냈고, 로노크 대학교 학보의 1909년 7월호에 실렸다.[20] 1910년경신학교 교감에 선임되었다.[12]

종교 활동으로는 1907년 '제7회 세계기독학생연맹세계대회'가 일본 동경에서 열렸을 때 윤치호(尹致昊)·김정식 등과 함께 대회에 참석하였다.[23] 새문안교회 집사로 교회 예배당 건설을 추진하였고 1910년 새문안교회 예배당 헌당과 함께 새문안교회 장로가 되었으며[24], 1910년 숭실중학교 교사로 출강하였다. 숭실중학교에서 그는 수사학(修辭學) 과목을 가르쳤다.[25]조병옥에 의하면 김규식은 수업 시간에 종종 영어시를 읊어주곤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셀리, 키이츠, 테니슨, 바이런 등의 시들을 잘 읽어 주었다.[25] 조병옥 숭실중학교 편입생 시절, 가장 재미있게 청강한 과목으로 김규식이 가르치던 수사학이었다 고 회고하였다.[25]

1911년 12월 경기·충청도장로교 연합회 서기로 뽑혔고, 1912년 2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12년 9월 1일 김규식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평양)에 영문(英文)으로 보고하였다.[25]

1913년 봄 김규식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장학금과 도쿄 외국어대학교 영어교수직, 도쿄 제국대학 동양학과 장학생 특별 입학(入學)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고,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람을 보내 도쿄 제국대학교 동양학과의 장학금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