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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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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중국 망명 초기

새문안 교회 전별식
새문안 교회 전별식

1911년 9월 조선총독부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구속, 투옥한다. 김규식은 극적으로 투옥은 모면하였다.[26]

1914년 몽골 이동 중 (왼쪽이 김규식, 가운데는 차남 김진동, 왼쪽은 사촌 누이 김은식(金殷植)
1914년 몽골 이동 중 (왼쪽이 김규식, 가운데는 차남 김진동, 왼쪽은 사촌 누이 김은식(金殷植)

1911년 105인 사건 이후로 일본 기독교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그는 1913년  인삼장사를 할 목적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경상남도의 한 갑부는 그에게 1천원의 자금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중국으로 망명할 때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왜놈들이 하도 못살게 굴어서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기로 했다'고 표현하였다.[27] 중국 망명후 신규식·여운형 등의 주도로 창설된 동제사의 중견임원으로 선임되었다. 윤치호의 이복동생인 윤치왕이 군사훈련을 배우겠다고 상하이를 찾아왔으나, 그는 기회가 많으니 영국에 가서 의학을 배워볼 것을 권고하여 영국으로 보내주었다.[28] 또한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대학에 가서 문학 공부를 계속한다, 미국에 간다는 등의 뜬소문을 유포시키기도 했다.

그의 후원자였던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스 언더우드 역시 그의 이런 계획을 전해듣고, 그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대학에 진학하여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 소문을 냈다. 그의 출국 소식을 접한 조선총독부에서는 국내 기독교계 인사들을 의심하였으나 미국인 선교사들 댁을 수색할 수는 없어 윤치호의 집을 수색하기도 했으나 그의 출국을 도왔다는 어떤 근거도 찾지 못하고 만다.

1913년 김규식은 베이징·상하이·난징 등지에 먼저 와 있던 여러 애국지사들과 접촉했다.[29] 13년 3월 쑨원, 친치메이, 황싱, 탕샤오이, 왕쳉팅, 웰링턴 V. 쿠 등 중국의 혁명 지도자들과 만나 교분을 쌓았고, 혁명파의 제2혁명에도 관여하였다.[29] 김규식은 중국 혁명 당시 냉휼(冷橘) 장군의 군대에 합류하여 방부(邦阜)[29] 까지 올라갔는데, 이 부대는 서주부(徐州府)에서 내려온 복벽파 장훈(張勳)의 군대 앞에서 어지러이 후퇴했다.[30] 1913년 9월중국 혁명은 실패하고 쑨원 등은 망명하면서 그는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오게 되었다.[31]

1918년때 김규식 박사.
1918년때 김규식 박사.

1913년 11월 춘원 이광수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단재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독립자금 모금, 무역상 활동

1910년대 김규식은 몽골에서 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했다.[32]

1914년부터 2년간 화북 몽고 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며 동제사에 가입하였고[33]신채호·홍명희·서병호(1885~1972) 등과 친분관계를 맺었다. 1914년 1월 독립자금을 모금하러 변복하고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신의주에 갔다가 일본경찰의 검거를 피해 되돌아가야 했다. 그해 가을 장래의 독립군단 또는 게릴라 부대를 양성할 목적으로 류동렬, 이태준과 청년들을 이끌고 몽골 울란바토르로 건너갔다. 여기서 상업과 노동으로 비용을 조달하며 초보적인 군사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자금이 쉽게 조달되지 않았고 이태준은 병사하여 항일군대 결성에는 실패하고 말았다.[34] 이후 피혁 장사를 하다가 잠시 공장에 취직하였으나 맞지 않아 바로 그만두고 허베이 성(華北省)으로 건너가 성경 기독교 용품을 판매하다가 상하이로 내려와서는 발동기계를 판매하였다.

두 번째 부인 김순애
두 번째 부인 김순애

1916년에 앤더슨&마이어회사(Anderson &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몽골 접경의 장가구앤더슨&마이어회사 지점에서 2년간 근무했다. 1916년 아내 조은수 여사가 차남 김진동을 데리고 외몽골로 찾아와 상봉하였으나, 1917년 여름 폐병으로 조은수 여사와 사별하였다.[35] 1918년 3월초 앤더슨&마이어 상사에서 외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지점을 열기로 계획하였는데, 그에게 지점장으로 부임해줄 것을 전보로 보내왔다. 아무도 울란바토르로 가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자청해서 지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때 그와 동행한 이는 앤더슨마이어 상사 사원 몇 명과 둘째 아들 김진동, 사촌 여동생 김은식(金殷植)이 동행하였다. 그 뒤 장가구에서 만리장성을 넘은 뒤 자동차로 사막을 횡단하였다. 그러나 차량 고장과 심한 눈보라로 하루 만에 내린 뒤 11일간 산지에 고립되어 있다가, 몽골어를 구사할 줄 알았기에 지나가던 몽골인에게 도움을 청하여 낙타를 타고 37일간 몽골 초원을 거쳐 울란바토르로 갔다. 1918년 6월, 출발 3개월만에 몽골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였다.

어학 재능이 뛰어났던 김규식은 다국어를 구사하였는데, 한국어 외에 영어, 한자(漢字),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36][37] 중국은 지역마다 방언의 차이가 심하였으나 한자를 잘 구사하던 그는 방언의 차이에 상관없이 어려움을 겪지 않고 중국인과도 대화할 수 있었다. 1917년 12월 친러한족중앙총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36]

신한청년당 창당과 재혼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 (앞줄 오른쪽 끝)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 (앞줄 오른쪽 끝)

1918년 여운형, 서병호 등의 초청으로 중국 톈진에서 상하이(上海)로 건너왔다. 1918년 8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조직되자, 여운형, 서병호, 조동호(趙東祜)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의 창립에 참가하였다. 동제사와 신한청년당 등의 단체 설립 이후 한국인 청년들이 너도나도 자원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그들에게 일시적인 감정보다는 먼 길을 내다보고 유학을 하여 공부할 것을 권고하며 돌려보내거나 프랑스, 미국, 영국 등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1918년 12월, 신한청년당은 독립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 대표단의 수석 대표로 임명하고[38] 프랑스로 파견하였다. 김규식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깊이 공감하였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파리강화회의에서의 좌절 이후 절망으로 변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차 프랑스에 있을 때 (1919년 1월 ~ 3월 무렵)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차 프랑스에 있을 때 (1919년 1월 ~ 3월 무렵)

프랑스 파리에서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고, 《한국 민족의 주장》·《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인쇄물을 출간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침략상과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널리 홍보했다.[38] 이는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기대한 것이었다.

이때 그는 상처한 처지였는데 1918년 12월 서병호 김필순의 소개로 황해남도 장연군 출신 김순애를 만나 재혼한다. 본래 김규식은 조은수와의 첫 결혼 이전에 김순애와도 혼담이 오갔다. 김규식은 결혼 직후 구식 여성이던 본처 조은수를 정신여학교에 입학시켰는데, 김순애는 조은수의 정신여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김순애의 사람됨을 알아본 조은수는 죽기 전 김순애와 재혼하라고 권고했다 한다. '당신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줄 것이니 꼭 김순애 양과 결혼하라'는 것이었다. 처음 그가 청혼했을 때 김순애는 받아주지 않았다. 김순애는 고된 결혼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독신주의를 고집했는데, 병중에 있던 친정어머니 안성은이 '너를 시집보내지 않으면 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라고 애원하여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18년 12월  난징의 한 선교사의 집에서 김순애와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린 뒤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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