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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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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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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과 귀국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외무부장에 선임되었다.[88] 그러나 김규식은 인공 내각 외무부장 취임을 거절하였다. 8월말 광복과 2차 대전 전승을 기념하여 시집 《양자유경 (양자강의 유혹)》을 내다.

상해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이 공항에서 환영 나온 교민들과 기념사진
상해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이 공항에서 환영 나온 교민들과 기념사진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때 그는 민족혁명당의 대표이자 임시정부 부주석 자격으로 김구 등과 함께 임정 1진으로 귀국하였다. 임정 귀국을 놓고도 먼저 귀국해야 한다는 한국독립당계와 민족혁명당계 간에 싸움이 발생했다. 그러나 김원봉의 양보, 혹은 당수인 김규식을 귀국 제1진에 넣는 조건으로 귀국문제가 종결되었다. 11월 23일 군산비행장에 착륙하여 차로 서울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조국은 미국 소련에 의해 분할되어 있었고, 김규식은 한탄하였다.

김규식 필체, 하단 중간, 해방후 환국기념서명포(보존자 안봉순
김규식 필체, 하단 중간, 해방후 환국기념서명포(보존자 안봉순
"우리가 피흘려 싸운 것이 고작 이런 대가 밖에 없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89]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한편 그는 8.15 광복에 대해 이런 견해를 피력하였다.

"진정한 민족의 광복은 해방,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본래 하나였던 우리 한민족이 불편 없이 통일되어 교류하고 상호 신뢰와 보완성을 유지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다른 민족이 우리 민족을 일러 단일 민족이니 우수한 민족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우리의 단결된 완전 독립국가 달성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때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우리 이천만 동포는 애 일같이 주인 정신을 살려 단합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 전력투구해야 할 것이다."[90]

1945년 9월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창설된 한국민주당에서는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 지도자를 당의 영수로 추대했다. 그러나 한민당에서는 김규식을 우익성향이 아닌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한민당의 영수 추대에서 제외되었다.[91][92]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미국에 파견, 전후 대책과 함께 이승만과 다른 교민지도자들과 연대함과 동시에 미국 정부의 의중을 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출국 직전 중국 정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아 출국이 무산되었다.

11월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을 방문, 임시정부 환송 송별회에 참석하였다. 국민당 관계자들과의 만찬 시 김규식은 승전축하 시를 한수 지어 헌정했다. 11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는 문제로 한독당계와 민혁당계 간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임정 요인 제1진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한독당계와 민혁당계 간 귀국순서를 놓고 싸움이 벌어지자 민혁당의 서기장이었던 김원봉은 한독당계에 1진을 양보했고, 민혁당계는 한독당에 양보하는 조건으로 부주석이자 민혁당 위원장인 김규식도 귀국 1진에 포함하라고 요구했다.[93]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에서 김구, 장준하, 안미생 등과 비행기를 타고 경기도 김포 비행장에 귀국했다.[93] 11월 귀국 직후 김규식은 윤치호를 방문했다. 이후 여러 번 윤치호를 방문했으나 윤치호는 김규식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는 않았다.[94][95]

해방후 정치활동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단상 첫줄 왼쪽 두 번째가 김규식, 좌측은 김구)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단상 첫줄 왼쪽 두 번째가 김규식, 좌측은 김구)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귀국하였지만 그는 임시정부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거나 비판적인 입장이었다.[13] 귀국 초,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이 그에게 무슨 병을 앓고 있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내가 무슨 병을 앓고 있느냐를 묻지 말고 내가 앓고 있지 않는 병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하였다.[50] 1945년 11월 28일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 환영회에 이승만, 김구와 함께 참석하였다.

카이로 회담에 "적당한 시기에 조선독립을 준다"고 한 '적당한 시기'란 우리가 늦출 수도 있는 것이고 빠르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손에 달렸단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만 하면 미군 소련군이 내일이라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못 보내고 있는 것은 우리 조선사람 전체의 책임인 것입니다.

11월 귀국 후 그는 서울 삼청장(三淸莊)에 여정을 풀었다. 귀국 초기 새문안교회를 찾아 새문안교회 인사들과 면담하였으며, 김구와 함께 의친왕을 방문, 면담하기도 했다. 중도파 혹은 온건우파 성향 때문에 좌익으로 인식되기도 했던 그는 김구, 이승만, 권동진, 오세창 등이 한민당의 영수로 추대되었을 때 배제되었다. 그러나 귀국 후 한민당으로부터도 꾸준한 교섭 제의를 받게 되었다.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그는 군정청 최고지도자 존 하지와 친밀하였으나, 이승만과 김구는 하지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그는 군정청 최고지도자 존 하지와 친밀하였으나, 이승만 김구는 하지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 1일 하오 2시 20분경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렬 등이 창을 일시에 열고 임정 환영행렬을 맞이하였다.[96]

삼청장에 기거하며 이시영, 조소앙, 류동렬 등과 함께 경교장을 수시로 방문하였다.[주해 7] 귀국 직후 인사차 임정을 방문한 여운형을 만났으나, 뒤이어 여운형이 경비원에게 끌려가 몸수색을 당하고 다시 들여보내지는 것을 목격했으나 이를 말리지 않았다.

1945년 12월 1일 돈암장 이승만으로부터 초대받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초대를 받고 12월 2일 돈암장을 방문, 2시간 동안 회담하였다.[97] 12월 9일 윤치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12월 경교장 임정 요인을 찾아온 청년 중 윤판석이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다. 그러자 김규식은 "일본 놈한테 배웠구먼, 왜놈들한테 배웠다...여보게 청년들 그런 짓은 하지 말게." 하며 만류하였다.[98]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부총재에 추대되었다.[99]

신탁통치 반대와 모스크바 3상 결정 지지
삼청장에서 망중한을 보내는 김규식 (1946년)
삼청장에서 망중한을 보내는 김규식 (1946년)

1945년 12월 27일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 영국 윈스턴 처칠 등 미영소 3개국 수뇌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김규식은 신탁통치 결정문의 원문을 즉시 입수하여 해석, 국민에게 발표하고 즉각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76명의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그 뒤 김규식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을 신중하게 검토하였으며, 그 내용이 현실적으로 남·북이 미소에 의해서 분할 점령되어 있는 상태에서 결코 우리에게 불리한 내용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자, 그는 반탁운동으로부터 이탈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모스크바 3상 회의 전문을 입수하고 읽은 이후에 부분적인 지지를 하였고, 반탁운동에서 탈퇴하였다고 하여 모스크바 3상 협정의 내용을 찬성하는 좌파들의 조직에도 가담하지는 않았다.[100][주해 8] 그러나 찬탁으로 노선을 전환하면서 김규식을 암살하려는 극우단체가 비밀리에 조직되기도 하였다.[101][102]

1945년 12월 말에는 미국에서 귀국한 김호 등 일부 재미인사들이 그를 도와 활동하기도 했다.[103]신탁통치 반대 입장에서 찬탁으로 선회하면서 그는 우익측으로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었다. 이승만 김구는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에 서게 됐다. 장덕수 이승만 김구를 방문하여 이승만 김구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이승만 김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미소공위의 불가피성을 이해한 김규식은 미소공위에도 찬성입장을 보였다. 미소공위에 찬성 내지는 지지 입장을 발표하자 역시 우익세력으로부터 비난받았다.[104][105]

1946년 1월 6일 기독교청년연합회가 서울 정동교회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초빙되었다.[106]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렸다. 1946년 1월 27일 남한에 세워질 정부가 중앙정부로서 유엔의 인정을 받으며, 또 이북과의 통합 방도가 세워진다면 남조선에서의 단독선거 문제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후일 그의 비서실장을 지낸 송남헌은 그가 '김규식이 군중에게 말하기를 '정부가 제주도에 세워졌더라도 그건 중앙정부다'라고 하던 분이 후에 가서는 주장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107] 송남헌에 의하면 김규식이 초기에 반탁을 지지했던 것에 대해 그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라고 했다.[107] 중국 체류 중에도 일본 영사관 경찰과 밀정의 테러와 암살 위협에 시달렸으나, 귀국 후에도 동포에 의한 테러, 암살 위혐은 그에게 비애감을 심어 주었다.

군정과 임정의 갈등 조절 노력
미군정 시기의 김규식
미군정 시기의 김규식

미군정기간 내내 김규식은 미군정과 한국인 지도자들 간의 협력을 위해 노력하였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의 호출을 불쾌해하며 미군정 방문을 거절하는 김구(金九)에게 '시대가 바뀌었다'며 미군정청을 방문하도록 설득한 것도 김규식이었다.

한편 그는 미군정의 각별한 호의를 받았다. 당시 한국 민간인 중 미군 군용 전화가 가설된 집은 이승만과 김규식의 집뿐이었으며[108], 이승만은 미군정과 갈등하다가 3월 20일 전화가 끊기게 된다.

민주의원 회의 진행 중인 김규식 (1946년 2월)
민주의원 회의 진행 중인 김규식 (1946년 2월)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109]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 주비회 통합체)에서 최고정무위원직(총 28명)에 선출되었다. 2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 개원에 참석했다. 민주의원이 개원 후, 김규식은 민주의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 등이 주도하는 우익의 반탁운동에는 소극적이었다. 미군정이 민주의원을 만들 때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온건한 좌파세력들을 포섭, 참여시키기 위하여 설득, 노력하였으나 여운형의 참여거부로 실패하였다.

미소공위에 참여해야 된다는 주장을 피력하면서 그는 매국노로 규탄당했고, 그를 암살하기 위한 백의사 조직원들이 삼청장을 쳐들어오려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우익 정치인 활동
김규식, 이승만, 김구
김규식, 이승만, 김구

1946년 3월 미소공위 참관 한인의 대표자로 선출됐다. 미소공위 참관 문안 작성 중 김준연(金俊淵)의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타이프로 신탁통치 관련 문서를 작성하던 중 찬성이라는 단어를 보고 김준연(金俊淵)은 이를 문제삼기도 했다. 또한 미군정청의 사령관 존 하지 장군은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 김규식을 좌우합작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였으며,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이 되게 하였다.[110] 1946년 2월 14일 민족혁명당 당수직을 사퇴하였다. 김성숙, 장건상, 김원봉 등이 임정을 떠나 민족주의민주전선에 가담하자, 민족혁명당을 탈당하였으며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진행하였다. 좌우합작 참여 배경은 미국 국무성의 요구로 실시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열린 덕수궁 앞에서 개최된 신탁통치 반대 집회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열린 덕수궁 앞에서 개최된 신탁통치 반대 집회

1946년 3월 1일 '3.1.기미년독립선언 기념사업회' 고문에 취임하였고, 3월에 미·소공위가 개최 예정되자,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기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3월 7일 소련 군정청 사령관 스티코프가 짠 초안에서 그는 향후 수립될 정부의 부수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111] 1946년 3월 19일 민주의원 의장 직무대리에 선출, 3월 20일 미소공위 개최때 미국 이승만의 반소반탁으로 인해, 이승만이 회의 전면에 나오는 것을 꺼렸고, 김규식이 대신 민주의원 의장대리로 미소공위에 참석하였다. 46년 3월 24일 미소공위에 대처하기 위한 민주의원내 미소공위 교섭단을 구성하여 단장에 취임했다. 3월 19일 이승만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했다.[108] 하게 되어 김규식은 민주의원 의장 대리에 취임했다. 이승만의 사퇴 이유는 표면상 이유는 건강문제였지만, 사실은 미군정이 미소공위 개최를 앞두고 철저한 반소(反蘇)주의자이며 신탁통치안을 격렬히 비판해 온 이승만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의장 대리에 김규식을 앉혔던 것이다.[108][112][113]

1946년 3월 10일 서울시내 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 열린 대한노총(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결성대회에 참석하고 대한노총 고문으로 선임되었다.[114] 한편 하지는 한때 좌익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도우파인 김규식(金奎植)을 이승만 대신 대통령으로 앉힐 생각도 했다고 한다.[115]

미소공위와 좌우 합작 노력

1946년 3월 20일에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한국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116]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117] 김구는 미소공위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지 앉하 하지 민주의원 의장대리 김규식은 김구에게 서명할 것을 종용하면서, 서명이 곧 신탁문제에 언질을 준 것은 아니라는 특별성명 등을 발표했다.[117] 그리하여 이승만, 한민당 측에 이어 김구가 서명에 동의하자 소련측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5월 초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117]

1946년 4월 26일 경성 정동교회에서 한국청년회를 결성하고 초대 총재에 선임되었다.[118] 한국청년단은 우익 청년단체이면서도 온건한 성향을 띄고 있었고, 주요한, 장준하 등이 한국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6월 10일 민주일보(民主日報) 창간때 명예사장에 추대되었다.[119] 그러나, 5월 10일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면서 이와 동시에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정읍에서 발언하는 사건이 터지자, 김규식은 이승만의 남한만의 단독정부론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단독정부수립운동은) 친일파,민족반역자 자본가들의 이익을 테러로 옹호하면서 민족분열을 내란으로 하고, 극소수의 이익을 위한 정권이라도 세워보자는 가공 가증의 음모이다. 지금이야 우리민족은 통일된 정부를 세워서 공존번영을 누리느냐, 분열된 전제정치를 세워 상잔상학의 비운에 빠지느냐 하는 가장 위험한 기로에 서있다. 우리 인민은 가장 냉정하게 이 두가지중 하나를 취하여야 할 것이다.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120] 1946년 5월 12일 이승만 등과 독립전취대회에 참석하였다.

5월 19일 이승만은 미소공위에 불참할 것을 공식 성명으로 발표했고, 김규식은 반박성명을 내고 전체 애국자는 적극 미소공위에 참가하라고 공식성명을 발표했다.[121] 그러자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박용만은 '김규식 박사의 주장에 따른다면 미소 공동위에 끝까지 불참을 표명했던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은 애국자가 아니고 자기만이 애국자라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이라며 비난하였다.[121]

미소공위 지지 선언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에서 미소공위지지 선언을 발표했다. 김규식은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122]그러나 그의 미소공위 지지는 우익 진영의 온갖 인신공격의 원인이 된다.

김규식은 좌우합작이 안될 것이라고 절망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길이라면 실패하겠지만 기꺼이 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한편 좌우합작위원회에 한민당에서는 대표를 보내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김규식의 설득으로 한민당에서도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표를 보냈다.

김규식은 한민당에서 온건한 분파의 지도자인 원세훈을 참가하게 하였다.[123] 1946년 6월 7월 동안 좌우합작위원회의 비공식적인 회의는 계속되었다. 4사람의 만장일치에 의하여 하지중장의 정치고문이 초대되어 중재자로서 그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회의 초에 버치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들이 함께 화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논평하였다.[123]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소련은 미소 양군의 철수를 주장했다. 소련측의 미소 양군 철퇴 주장에 대해서 김규식과 홍명희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으나, 중도파 정당들은 민족자주의 입장에서 원칙적으로는 양군 철수를 지지했다.[124]

좌우합작운동 전개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1946년 5월 김규식은 원세훈 여운형을 찾아가 좌우합작을 시도하였고 여운형이 이를 승낙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었다. 5월 15일 서울운동장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한구석에서라도 독립정부가 세워진다면 주권을 되찾는 것'이라고 연설하였다. 6월 전향한 조봉암이 중간운동 하던 리극로와 손잡고 조직한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들었다. 그런데 독립전선이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려 하자 김규식은 이를 거부했다.[125]

조봉암은 공산당을 탈당한 후 김규식 박사를 만나려고 했는데, 김규식은 조봉암의 면담요청을 거부하였다. 강원용이 김규식 박사한테 “만나야지 왜 거부합니까” 했더니 “이 사람아, 한 번 공산당 한 사람은 바뀌지 않아. 조봉암씨는 믿을 수 없어. 공산당 하던 사람을 어떻게 믿어” 하는 것이었다.[125] 그 무렵 조봉암 공산당을 탈당한 게 아니라 박헌영 이승엽을 인천지구당 책임자로 앉혔기 때문에 반발했을 뿐이라는 소문이 돌았다.[125] 조봉암은 김규식을 지지하고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김규식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25] 김규식은 공산당이라고 하면 전향 여부를 떠나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다. 강원룡에 의하면 그래서 조봉암이 좌우합작위원회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극로와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라 한다.[125]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앞줄 가운데가 김규식, 오른쪽은 김붕준과 안재홍, 오른쪽 맨 끝은 원세훈)
좌우합작위원회 위원
(앞줄 가운데가 김규식, 오른쪽은 김붕준 안재홍, 오른쪽 맨 끝은 원세훈)

1946년 7월 3일 김규식은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였다가 안재홍과 함께 용공분자로 모는 삐라가 나돌고 벽보가 붙기도 했다. 기독연맹 모임에서 김구의 연설에 이어 김규식이 연설을 하였을 때 참석자들이 모두 귀를 막아 김규식은 퇴장하였다.[126] 거리에는 그들을 공격하는 내용이 잔뜩 담긴 전단이 살포되고 벽보가 나붙었다. 전단이 뿌려진 그날 괴청년들은 김규식의 집을 둘러싸고 김규식과 안재홍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안재홍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반탁, '반(反) 과도입법위원회'의 내용을 담은 전단을 살포하였다.[126]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 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선출되었고[110] 1946년 10월 민중동맹(民衆同盟)을 창당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과도입법의원은 각 단위 마을 대표자가  단위 대표자를 선발하고 면 대표자는 단위, 군단위 대표자는 단위, 도단위 대표자가 입법의원 의원을 최종 선발하는 제도였다. 과도입법의원은 합작 7원칙에 따라 출범되었고, 김규식은 과도입법의원을 통해 좌우합작을 모색하였으나 여운형 일파와 장택상 일파가 과도입법의원 참가를 거부하여 처음부터 난항했다.[2] 또한 과도입법위원회 선거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된 한민당 일파를 낙선시켰다 한다. 이 일로 한민당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된다. 좌우합작에 적극 참여하는 그의 포용적인 자세를 높이 평가한 미 군정측은 이승만이나 김구 대신 그를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세울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2] 소련 역시도 조만식과 함께 그를 과도정부의 총리혹은 수반으로 계획하기도 했다.[2]